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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훈 감독의 영화 '터널'은 단순한 재난 상황을 넘어선 사회적 고발성과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작품이다. 터널이라는 공간은 구조적 무능, 책임 전가, 그리고 극한 상황 속 인간성 회복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견인한다. 본 리뷰에서는 영화 속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 상징성과 사회비판적 시선,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을 영화 평론가적 시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영화 터널 사진

    무능의 상징 - 시스템의 부재

    '터널'은 시작부터 국가 재난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주인공 정수(하정우 분)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가족에게 케이크를 사 들고 귀가하던 중 터널 붕괴 사고에 휘말린다. 이 사건을 통해 김성훈 감독은 재난 발생 시 작동해야 할 구조체계가 얼마나 허술하게 운영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영화는 붕괴 직후부터 구조 완료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매우 현실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대응 체계를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특히 영화는 여러 공공기관의 책임 전가와 관료적 대응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재난 대응을 지휘하는 정부 부처들은 명확한 컨트롤타워 없이 각자의 입장만을 고수하며, 현장 구조 책임자조차 정치적 압박과 언론 노출에 휘둘린다.

     

    실제 재난 현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회의만 거듭하는 리더십 부재', '실무자와 결정권자의 괴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이 여전히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더불어, 생존자인 정수가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보이는 일련의 행정 대응은 생명을 다루는 일이 아닌, 행정 절차의 전시에 가까워 보인다.

     

    휴대폰 배터리 문제, 생필품 전달 실패, 지체되는 구조 일정 등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상징 그 자체다. 김 감독은 이를 통해 “국가란 무엇인가?”, “재난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소외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결국, '터널' 속 무능은 비단 사고 대응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생명 경시와 무관심의 문제로 확장되어 해석된다.

    책임의 본질 - 보여주기식 구조의 한계

    영화 ‘터널’에서 가장 비판적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재난을 대하는 국가와 언론의 태도다. 겉으로는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계산과 홍보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영화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보여주기식 구조 활동’이라는 기묘한 연극을 통해 극대화된다.

     

    카메라 앞에서만 구조 작업을 열심히 하는 척하는 장면, 포토존처럼 꾸며진 현장, 감성적인 브리핑. 이 모든 요소는 실질적 구조가 아닌, ‘보여주기’를 위한 구조라는 씁쓸한 현실을 상징한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복합적인 레이어를 통해 답을 제시한다. 실질적 책임자가 아닌 하위 구조 책임자가 부담을 떠안고, 결정권자는 결국 여론의 향방에 따라 구조 중단을 선언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장면은, 구조 작업을 갑자기 중단하려는 결정에 한 구조대원이 격렬히 반대하며 “아직 살아 있는데 중단한다고요?”라고 외치는 대목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책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관객에게 되묻는 장치다. 또한, 언론은 그들의 논리대로 살아남는다. 살아 있는 정수를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로 보도하며, 공공기관의 책임을 덜어주는 역할을 자처한다. ‘국민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생존자의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는 점에서, 언론도 책임 회피의 공범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책임이 무게감 있는 행위가 아닌, 정치적 생존과 여론 관리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터널'은 이처럼 책임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를 재정의하게 만든다. 진정한 책임은 생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되며, 이는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윤리의식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남긴다. 결국 감독은 영화 내내 책임이라는 개념을 추상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관객이 그 무게를 체감하도록 만든다.

    인간성의 회복 - 극한 속에서 피어나는 공감

    터널이라는 폐쇄적 공간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을 상징한다. 이 고립은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정수라는 개인의 정서적, 사회적 고립감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고립된 공간에서 오히려 인간성은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터널'이 단순한 사회비판적 재난영화를 넘어선 이유다.

     

    영화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본성과 관계에 집중하며,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정수는 구조되지 못한 채 어둠과 침묵 속에서 극한의 시간을 보낸다. 그의 곁에는 우연히 함께 갇히게 된 개 한 마리가 있다. 정수는 본인도 생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그 개를 보살피고, 먹을 것을 나눠준다. 이 장면은 인간성과 연민, 그리고 생명에 대한 존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더불어, 이 개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정수가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자, 사회와의 끈을 상징한다. 이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도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감독의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편, 정수의 아내(배두나 분)는 남편이 살아있음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언론과 정부가 점차 생존 가능성을 부정하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굳건히 구조를 요구한다. 이 또한 인간성의 한 단면이다. 사회는 냉정하게 판단하고 포기하지만, 인간은 끝까지 기다리고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내세우는 또 다른 메시지, 즉 ‘희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감독의 진지한 탐구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수가 구조되는 순간, 관객은 안도와 동시에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는 단순한 생존의 기쁨이 아닌, 인간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터널'은 인간성의 회복이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결국 관객에게 ‘우리는 서로를 구조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결론: 영화 '터널'이 던지는 질문

    김성훈 감독의 ‘터널’은 단지 한 사람의 생존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곧 한 사회의 민낯을 투영한 리얼리즘이며, 관료주의, 언론의 역할,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이다. 영화는 끝내 묻는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재난 앞에 진정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터널 속 어둠보다 더 깊고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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