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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위플래쉬(Whiplash)는 단순한 음악영화로 분류되기엔 너무나 날카롭고, 심리 스릴러로 보기엔 예술에 대한 찬양이 너무 깊습니다. 데미언 셔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음악이라는 장르를 매개로 인간 본성과 예술의 본질, 그리고 ‘위대함’에 대한 강박을 풀어냅니다. 플렛처 교수와 제자 앤드류 사이의 스파크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 예술 창작에 따르는 고통과 구원이라는 극단적 상반을 상징합니다. 이 영화는 집착, 재능, 경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예술을 이루는 치열한 내면 세계를 해부하며, 관객에게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과연 위대해지고 싶은가? 그 대가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집착: 예술을 향한 과한 열망
앤드류가 연습실에서 드럼을 두드리는 장면은 곧 폭력의 형태로 진화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손, 그 손으로 다시 스틱을 쥐고 연습을 반복하는 장면은 ‘노력’이라는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광기 어린 집착이며, 그의 눈빛에서조차 감정이 사라지고 기계적인 움직임만 남아있습니다. 이는 예술가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고통을 통해 탄생하는 결과물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집착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는 현실에서 예술가들이 흔히 겪는 '몰입의 덫'을 은유하는 장치이며, 자기 존재를 작품에 완전히 흡수시키는 행위입니다. 영화 속 앤드류는 주변 인간관계를 거의 전부 정리하며 음악에 몰입합니다. 연인은 '방해 요소'가 되고, 가족은 자신의 열정에 무관심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심지어는 교통사고 직후에도 경연 무대에 올라 드럼을 치려는 장면에서, 그는 인간으로서의 본능마저 버린 듯 보입니다.
이는 플렛처의 교육방식과 맞물려, 예술이 때로는 인간성을 소모하는 방식으로 작동함을 보여줍니다. 플렛처는 찰리 파커의 일화를 인용하며 "정말 위대한 자는 시련 속에서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최고'는 단순히 기술을 뛰어넘는, 정신과 육체의 붕괴를 감수할 수 있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앤드류는 그 기준을 만족시키려 자신을 파괴합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집착’은 단순한 성취욕이 아니라, 존재의 전부를 건 예술에 대한 광기 어린 사랑입니다.
재능: 타고난 능력과 노력의 경계
플렛처는 천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는 듯 자신을 신의 위치에 둡니다. 그는 ‘좋았어’라는 말조차 재능을 망치는 가장 해로운 말이라 단언합니다. 이 발언은 영화 전체의 철학을 압축하는 핵심 대사입니다. 그는 평균에 안주하는 것을 최악으로 여기며, 진정한 재능은 혹독한 비판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믿습니다. 이 철학은 한편으로는 예술계에서 실제로도 존재하는 ‘스승의 권위’ 문제를 환기시키며, 그 위계 구조 안에서 진짜 재능이 평가받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앤드류는 단연 재능을 타고난 인물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재능이 단지 선천적 소질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 재능은 끊임없는 반복 연습, 플렛처의 가학적 테스트, 무대 위의 굴욕과 공포 속에서 단련되어 갑니다. 중요한 점은, 그가 그 과정에서 점차 ‘인간’이 아닌 ‘기계’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재능은 고통을 전제로 완성되며, 그 속에서 감성적 교감은 점차 사라집니다. 이는 '기술적 완벽함'과 '예술적 진정성' 사이의 균열을 암시합니다.
또한, 영화는 경쟁자들과의 대조를 통해 재능의 복합성을 드러냅니다. 체이스는 플렛처가 한때 인정했던 드러머였지만, 앤드류와의 비교 속에서 점차 무너집니다. 이 과정은 재능이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 심리, 그리고 선택의 연속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재능은 시작점일 뿐, 진정한 예술은 그것을 갈고닦는 집요함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성이란, 때로는 인간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대가임을 잊지 않습니다.
경쟁: 예술 안의 무한경쟁
위플래쉬의 학교는 음악학원이 아니라 하나의 전장입니다. 플렛처의 리더십 아래 학생들은 늘 긴장 속에 살아가며, 언제든 무대에서 밀려날 수 있는 불안정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이 경쟁 구도는 단순한 실력 경쟁이 아니라, 심리적 압박과 정서적 조종까지 포함된 생존 게임입니다. 플렛처는 감정 없는 얼굴로 학생들을 갈아치우고,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승이 아니라 실험자이며, 학생들은 그의 피실험자입니다.
이러한 경쟁은 단순히 개인 간의 비교를 넘어서 구조적 시스템을 상징합니다. 앤드류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견제하며, 자신조차도 끊임없는 의심 속에 갇혀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단순한 기량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력, 체력, 감정조절 능력, 자기 확신 등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플렛처가 바라는 ‘완벽한 드러머’는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까지 통제 가능한 '예술 병기'입니다.
앤드류는 결국 플렛처와의 심리전 끝에 무대 위에서 전설적인 연주를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마치 글래디에이터의 결투처럼 연출되며, 음악이 아닌 전쟁의 메타포로 읽힐 수 있습니다. 관객은 박수를 치지만, 그 박수는 승리의 축하인지, 혹은 잔혹한 시스템에 순응한 자에 대한 연민인지 불분명합니다. 영화는 이 경쟁이 인간을 파괴함과 동시에, 예술이라는 정점으로 이끈다는 역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으며, 오히려 추하고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절절히 느끼게 합니다.
결론: 음악, 그리고 인간 본질의 탐구
위플래쉬는 예술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꺼내 보여주는 보기 드문 작품입니다. 집착은 예술가가 끝까지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을 불태우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재능은 시작일 뿐이며, 진짜 예술은 그것을 갈고닦는 고통 속에서만 탄생합니다. 경쟁은 예술을 진보시키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갈아 넣는 잔혹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진짜 위대해지고 싶은가?’ 그 물음 앞에 쉽게 답할 수 없는 이유는, 영화가 보여준 그 위대함의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악이라는 장르 안에서 펼쳐진 이 철학적 논쟁은 단지 예술가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